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

품격있는 사회 만들기?

품격있는 사회 만들기?(3월 9일자 도민일보 도민시론을 읽고)
-----------------------------------------------------------
도민시론을 읽고나서 쓴 글입니다.
------------------------------------------------------------------------------------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김인영 교수가 강원도민일보를 통해 “품격 있는 사회 만들기”라는 제호의 ‘도민시론’을 투고했다. 참으로 반가운 제호의 글이었다. 특정 시대와 사회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품격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기를 마다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 반가움은 이내 실망과 의구심으로 바뀌었다. 김인영 교수가 제기한 격조를 잃은 우리 사회의 현실에는 그 본질이 없고, 그가 제기한 대안은 조금 우습기까지 하다.

김인영 교수는 소위 격조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에 대해 지난 해 국회의 극렬했던 대치상황과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시위를 예로 들었다. 그는 먼저 교수답게 parliament, 즉 의회의 어원이 라틴어와 프랑스어의 단어 ‘말’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밝히고 그런 의회에서 쇠망치와 전기톱이 등장하고, 정당대표가 공중부양을 하고, 의원들이 서로 목을 조르는 모습 등을 예로 들며 우리 사회의 품격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광우병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시위대들의 언어와 행동들이 우리 사회의 격을 한없이 떨어뜨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인영 교수의 지적에는 그러한 행동이 나타나게 된 본질에 대한 성찰이 없다. 의회에서 있었던 대치상황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국회 파행의 본질은 김교수가 묘사했던 온갖 폭력적인 충돌이 아니다. 민의를 대변해야 할 국회가 국민과 여러 시민사회의 의견을 무시하고 갖가지 반민주적인 법들을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던 것이 본질이다. 김 교수가 지적했듯 일반인조차 경제적 자신감을 잃고 있는 지금, 그들을 외면하고 일부 부유층의 배를 불리기 위한 법, 언론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법 따위들을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려 했기에 일어난 필연적인 충돌이었다. 김인영 교수가 소통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현상적인 모습만을 부각시켜 ‘격’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또한 김인영 교수는 촛불시위에 대하여 “이성적인 질문 없이 우리 사회 전체가 격한 감성에 휩쓸려 격조를 잃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십만의 국민들이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이유는 김교수의 주장처럼 무슨 격한 감성에 휩싸였기 때문도 아니고, 보수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긴 진보세력의 비이성도 아니다. 안전성 보장이 가장 중요한 먹거리 문제에 있어, 그것이 보장되지 않은 쇠고기를 수입해 기업의 이윤을 보장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 대한 지극히 이성적인 반대 의사표시가 바로 광우병 촛불시위였다. 비록 일부 시위대의 감정적 언행과 행동이 없지 않았겠지만, 이를 부각시켜 전체 촛불시위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김인영 교수가 진정 우리 사회의 품격을 논하려 했다면, 국회 파행과 촛불시위의 현상적인 측면을 논할 것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사람과 환경쯤은 우습게 여기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풍토를 지적했어야 맞다. 일부 부유층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 대다수의 서민들이 외면되고, 국민의 먹거리 안전, 생태적 가치보다 기업의 이윤을 우선시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격조와 품격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무슨 휘황찬란한 ‘브랜드’를 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전통적인 선비정신을 복원하는 것도 아니다. 품격 있는 사회란 인간의 가치가 올곧게 실현되는 사회이며, 불의와 탐욕이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사회가 아닐까?

 

----------아래는 기사 원문----------------------------------------------------------------------

품격있는 사회 만들기


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우리 사회의 말과 행동들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 사회의 말만 예사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동도 도를 지나쳐 보인다. 하지만 모범을 보여야 할 자칭 입법기관인 국회의원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회에서 일어나는 의원들의 행동을 보면 ‘폭력, 전쟁, 막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조차도 부끄럽다. 국회가 말보다는 몸싸움을 주로 해왔던 것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작년 말과 같이 국회에 쇠망치와 전기톱이 등장하고, 의장 단상 주변에서 등산용 자일로 자신들을 묶고, 정당대표가 공중부양으로 자신의 화를 표출하고, 의원의 목을 헤드록으로 조른 적은 없다. 의회를 지칭하는 영어 단어인 parliament는 라틴어의 parliamentum과 프랑스 단어인 parler에서 유래한 말로 원래의 의미는 ‘말하다(talk)’라는 뜻이었다.

 

우리 사회가 도대체 왜 이러는가? 경제가 어려워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인가?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가 보수-진보로 갈라져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그 갈등이 아직도 계속되기 때문인가? 사실 지난 해 상반기에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광우병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시위대들의 언어와 행동들은 이미 우리 사회의 격(格)을 한없이 떨어뜨렸다. 시위대들은 미국산 소고기를 청산가리에 비유한 연예인에 동조했고, 시위 참가 일부 여학생들은 수입산 크림만 발라도 광우병에 걸려 다우너소가 되는 줄 알고 더 살고 싶다고 외쳤다.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동조해서 이명박 정부에 증오와 저주를 퍼부었다. 대통령에 대한 욕설은 기본이요, 정권퇴진을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면 자신들만 국민이고 대통령을 찍어준 국민은 국민이 아니라는 말인가?

 

광우병 촛불시위에서 보듯이 ‘진짜 그럴까’라는 이성적 질문 한번 없이 우리 사회 전체가 격한 감성에 휩쓸려 격조를 잃었었다. 진짜 이유는 진보세력은 보수세력이 무조건 싫었기 때문이었고, 보수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긴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방은 공존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비이성적인 격한 감성사회를 만든 이유라고 보여 진다. 그리고 작년 후반부터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우리사회가 급격히 경제적 위기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일반인조차 경제적 자신감을 잃기 시작하였다. 경제적 자신감의 상실이 사회를 더욱 각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우리 사회가 각박해지고, 서로를 증오하고, 선진국은커녕 품위 없는 사회로 전락하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다. 그래서 모두들 김수환 추기경의 영면을 그렇게 슬퍼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추기경님이 보여준 인생은 품격 있는 인생 그 자체이다. 강자(强者)에게는 정의(正義)를 요구했지만, 약자(弱者)에게는 지극히 자애롭고 겸손하셨다.

 

수년전에 일본의 후지와라 마사히코라는 한 대학 교수가 ‘국가(國家)의 품격(品格)’을 주장한 적이 있다. 일본이 아메리카화 되고, 무조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데 질주 할 것이 아니라 품격 있는 국가가 되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 사회 역시 선진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선진화 과제의 핵심은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일 것이다. 강원도도 ‘강원도의 힘’ 보다는 ‘품격 있는 강원도’를 목표로 삼는다면 어떨까? 인구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전국 대비 3.04%의 152만 강원도 인구로는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따라서 다른 브랜드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인데,‘청정 강원도’도 환경친화적이어서 좋지만 선진 강원도로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춘천, 원주, 강릉이 전통적으로 지녀온 ‘품격(品格)’ 살리기를 제안하고 싶다. 사회운동으로 말이다.